선의, 통섭, 그리고 21세기 지성사?

선의로 시작해, 통섭을 거쳐, 좀 더 확대되는 지성

정치란 기본적으로 저질스럽다. 인간의 욕망을 다루는 장이기 때문에 손에 더러운 것 안 묻히겠다는 자세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깨끗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덕목이다.

나는 지성인이 아니기에 20세기 지성사니 21세기 지성사니 하는 말에 별로 공감이 일어나지 않는데, 일단 내가 지지하겠다고 한 안희정 지사가, 그것도 방송에서 꺼내 들었으니 공부나 할 요량으로 키보드 앞에 앉았다. 과연 선의(善意), 통섭(通涉), 지성사(知性史)는 무엇인가?

일단 통섭이란 단어다. 이게 한자인데, 아마도 통섭(通涉)일 것 같다. 통할 통, 건널 섭이다. 어원이 영어이며, ‘Consilience’라고 쓴다.

찾아보니 “지식의 통합”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연결하고자 하는 통합 학문 이론으로서,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사실에 기반을 둔 이론을 연결함으로써 지식을 통합(統合)하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한자 자체만 봐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이 선의와 통섭이라는 단어와 함께 20세기 지성사를 거론하면서 21세기 지성사는 달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모 교수는 해부, 분석, 비판은 지성의 기본인데, 선의로 접근하면 지성의 산물이라 할 비판이 나올 수 없으므로 21세기 지성사는 다르게 나타나야 한다는 안 지사의 발언은 모순이라고 지적한다. 선의로 다가가면 비판 의지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안 지사는 정치인이다. 학자나 언론인은 비판의 수준에서 머물 수도 있고, 그것을 넘어선 인식의 정리나 대안 제시까지 나아가고 말고 할 자유가 있지만, 정치인은 그저 비판에 머물러서는 그 역할을 다 했다고 할 수 없다. 안희정이 보는 지성사는 책 속에 있는 지성이 아니라 현실화된 지성의 산물로 정치 체제나 정치 문화 등에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 점이 다르다.

이런 연장 선상에서 안 지사는 비판적 단계에 머물렀던 지성이 선의로 시작해, 통섭을 거쳐, 좀 더 발전한 지성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쉽게 풀어쓰면 모두를 일단 인정하는 것이 첫 단계이고, 모든 것을 두루 살펴 연결하는 고찰을 통해, 정치사회적 대안까지 내놓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지성(知性)이란 사람이 접한 정보 등을 바탕으로 인식(認識)을 낳게 하는 정신 작용이다. 이성적 사고로 상황에 적응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성질이라는 심리학적 정의도 있다. 글자 자체로 보면 판단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단계로 발전해야 하고, 철학적으로는 어떤 명제에 대해 자신의 인식이 참이라는 결과가 가능해야 인식이며, 지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문제를 해결하는 성질 또한 존재하기 때문에 그저 비판에 머무르는 것은 온전한 지성이 아니라는 주장이 가능해지는 부분이다. 적어도 인식 수준에 다다라야 하고, 정치적으로 보면 명제의 참인 인식을 바탕으로 사회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단계에 들어가야 진정한 지성이라는 뜻이다.

솔직히 정치 현장에서 이런 수준의 발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좀 의아스럽기는 하다. 중학교 3학년이 알아들을 수준으로 말해야 한다는 조언이 난무하는 여의도에서 정당 생활을 오래도록 한 안 지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문제의식은 가치가 있다. 나는 그가 이런 인식을 버리지 말고 더욱 쉽고 현실적인 예를 들어가며 지속적으로 사회에 호소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참고:

‘에드워드 윌슨’의 저서 ‘consilience’를 ‘통섭’이라고 번역하고, 이 개념을 널리 알린 최재천(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는 어떤 인터뷰에서 이렇게 정리했다.

통합(統合)은 물리적으로 합친 것, 융합(融合)은 화학적으로 진짜로 합친 것이며, 통섭(通涉)은 남녀가 만나 자식을 낳는 과정이라고 쉽게 풀이했다. 그러면서 여러 지식과 기술이 합쳐 새로운 기술로 융합되어야 한다는 것은 목표가 될 수 있는데, 통섭을 융합하기 위한 방법론이자, 철학이라고 정의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