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는 누가 만드나

송두율 교수는 2002년 출간한 저서 <경계인의 사색>에서 자신을 ‘경계인’이라고 규정했다. 남과 북,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경계선 위에 서서 상생의 길을 찾아 여전히 헤매고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2003년과 2004년을 달군 간첩 김철수 논란으로 옥고까지 치렀지만, 간첩 혐의는 결국 무죄를 받았고 북한 방문 등을 이유로 유죄를 받았던 국가보안법 위반 또한 대법원에서 파기됐다. 독일 국민 신분이기 때문이다. 한국 국적이었더라면 유죄다.

우리 사회는 경계인을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가 강하다.

진보 보수, 우파 좌파 떠들지만 그건 다 헛소리고, 심지어 정치인과 일반인조차 구분하는 문화도 있는데, 나는 이게 영 마땅치 않다. 왜냐하면, 그런 규정으로 보면 나는 경계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벌어지는 사태(나는 다른 의미에서 지금의 상황은 진정한 사태라고 생각한다.)를 가만히 보면, 정치 일선이나 권력 주변에 잠시라도 경험이 있는 사람이 볼 때 어이가 없는 부분도 많다. 명확한 예로 ‘비선’이라는 규정이 그렇다. 그런 식이면 동네 이장도 비선이 있다.

정치인과 일반인의 경계를 두려는 의도는 말할 것도 없이 기존의 정치인들에게서 발생한다. 자리가 한정적이기 때문인데, 문제는 일반인들이 정치인뿐만 아니라 정치권 전체를 불신한다는 것이다.

불신은 대개 정보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이 정보의 부족을 채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사람의 교체 이상으로 효과적인 것이 없다. 직접 경험과 그 경험의 나눔이 있을 때 훨씬 이해하기 쉽다. 이해가 되어야 동의도 되고 신뢰도 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이 나라는 지금 그런 구조가 허약하다. 이걸 대체할 것이라곤 언론뿐인데 이마저도 절름발이다. 언론이 돈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생태계에 놓여 있다. 사람들은 이걸 걱정하지만, 정작 언론으로부터 정보를 받으면서도 대가를 치르려고는 하지 않는다.

결국,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구현되려면 사람들이 우선 대가를 치러야 한다.

국민참여 경선이나 정당의 모바일 선거 논란이 재미있는 현상인데, 평소에 당원으로서는 활동하지 않으면서 때만 되면 결정권을 행사하는 형식이다. 차라리 그럴 거면 상시 당원 구조를 없애자는 논의도 없던 것이 아니지만, 기존의 정치권은 그럴 상상력조차 부족하고 의지도 없다.

어떤 정치인이 고작 ‘선의’라는 단어 하나로 몰매를 맞는 이런 상황은 결국 모두의 패배가 될 것이 자명한데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한다. 실체가 불분명한 여론 눈치를 보는 것인데 이건 또다른 의미의 경계인들이다. 기회주의자들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세상에 경계란 사라지지 않을 것이지만, 그 경계가 높다란 벽이 될 때 우리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경계에 선 사람들은 소중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우리라는 공동체, 경계의 이쪽 저쪽에 무리지은 이들의 거울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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