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 자의 광주 – 에필로그

기억하는 자의 광주 – 에필로그

【6】 에필로그

1980년 봄의 항쟁이 그냥 그대로 끝나버린 것은 아니다. 금남로를 붉게 물들였던 광주시민의 피와 눈물 또한 결코 허망하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해 5월 짓밟혀버렸던 민주주의에의 열망은 몇 해가 지나지 않아서 몇백 배, 몇천 배 더 크고 강력한 민중의 힘으로 부활했다. 광주민중항쟁은 단지 한 시대 역사의 좌절이었던 것이 아니라 1980년대의 전진을 기약하는 고통스러운 출발점이기도 했던 것이다.

전두환의 신군부가 동포의 선혈로 흠뻑 젖은 권좌를 차지한 이후, 더욱 폭넓고 강력한 민중의 힘이 대폭발을 예비하는 데는 5년이 걸렸다. 그것은 1980년 5월의 그 엄청난 공포와 허무를 딛고 투쟁의 의지와 희망을 갖추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세월이었는지 모른다. 소위 개혁주도세력을 자처했던 5공화국 집권층이 천문학적 규모의 부정부패를 일삼으면서 민중의 불만은 극심해졌고, 숱한 목숨을 희생시키면서 그들과 맞선 학생들의 선도적 투쟁이 조금씩 민중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한 1983년 12월, 전두환 정권은 소위 <학원자율화 조치>라는 이름의 유화정책을 시행하여 민심을 현혹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개혁할 의지와 능력이 없는 지배층이 어설픈 개혁을 추진할 때가 가장 위험한 시기>라는 말처럼, 그들은 이때부터 민중의 강력한 저항에 밀려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197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신체제가 붕괴의 징후를 보였듯, 전두환 정권은 1985년 2.12 총선에서 주체할 수 없는 민의의 태풍을 만났다. 국민은 이 선거에서 파쇼정권의 들러리 노릇을 해온 관제야당 민한당을 일거에 와해시키고 김대중·김영삼 두 야당지도자를 현실정치에 복귀시켜 제5공화국에 반대의 깃발을 들었다. 그리고 그해 봄부터 동포를 학살하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에 대하여 민중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1985년 봄 이후 전개된 민중의 반격은 광주민중항쟁이 우리의 민족사에 무엇을 남겼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1980년 봄 민주화운동과 광주민중항쟁의 사상·조직·투쟁방법상의 오류에 대한 뼈아픈 반성으로부터 태어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1980년 봄 민주화운동의 가장 중대한 판단 오류는 <미국에 대한 환상>이었다. 미국 행정부가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한국의 민주화에 유리하게 움직일 것이라는 판단은 애초부터 이론적·실증적인 논거를 가진 결론이 아니라 하나의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물론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겸직을 문제 삼아 한미안보협의회를 무기 연기시키고, 기회 있을 때마다 순조로운 정치발전을 강조한 미국 행정부의 언행이 이런 환상을 부추겼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1980년 5월 23일 항공모함 코럴시 호가 한국해역에 급파되었을 때 광주시민들은 미국이 전두환의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해 나섰다며 이를 반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동화 같은 환상이 일반 대중에게만 유포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누구보다 먼저 신군부의 음모를 눈치 채고 투쟁했던 대학생들조차 <민주화의 우방인 미국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그들이 과거 유신체제를 지원했던 사실에 대해 일체 비판을 삼가고 있었다.

미국 행정부는 이런 환상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결코 그에 부응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이 책에서 미국 행정부가 신군부의 쿠데타와 광주항쟁 유혈 진압을 <묵인> 또는 <방조>했다는 등의 표현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그런 표현은 미국 행정부가 그것을 저지하거나 응징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기대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기대는, 강대국의 내정간섭을 정당화한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실제 존재했던 한미관계의 실상에도 어긋나는 터무니없는 환상에 불과하다. 미국 행정부는 신군부의 쿠데타와 광주항쟁 유혈 진압을 묵인 또는 방조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지원하고 지지했다.

당시 미국 행정부의 대한정책의 기본목표는 한국인의 자유와 행복을 증진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 있어서 미국의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이익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1980년 봄에 그들이 보여주었던 행동은 여기서 단 한 걸음도 벗어나 본 일이 없다. 그들은 광신적 반공주의와 친미주의에 사로잡힌 지배집단 내부의 권력투쟁에 대해서는 어느 한 쪽을 편들지 않으며 단지 이긴 자를 파트너로 삼을 뿐이다. 그들은 12·12 당시 육군본부 측의 병력출동을 제지하고 경복궁의 반란군의 지휘부에도 똑같은 요구를 전달했다. 대규모의 군사충돌이나 내전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누가 군부의 패권을 장악하건 큰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미국 행정부의 조치는 이미 육군본부의 적법한 지휘체제를 이탈하여 내전을 불사하고 반란을 일으킨 쿠데타 군부를 결정적으로 지원한 것이었다. 이는 객관적으로 볼 때 다분히 고의적인 행동이었으며, 만에 하나 고의성이 없었다 할지라도 최소한 <미필적 고의>에 의해 12·12 쿠데타를 지원한 것이었다.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광주항쟁의 진압 과정에서 미국 행정부는 더욱 분명하게 신군부를 지원했다. 그들은 신군부가 소위 충정작전에 사용할 수 있도록 20사단과 33사단 일부 병력의 작전통제권을 이의 없이 넘겨주고 이 부대의 광주파견을 승인했다. 또 그들은 북한의 남침징후가 전혀 없는 상황임에도 항공모함을 급파하여 신군부가 국민의 불안심리를 광범위하게 조장하는 데 일조하고 계엄군이 마음 놓고 광주를 타격할 수 있도록 <망을 봐 주었다.>

광주민중항쟁은 그 자체로서 반미적 성격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민중의 힘이 역사의 전면으로 튀어나와 독재정권을 타도할 때 민주화운동은 필연적으로 민족자주 민족통일을 지향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미국 행정부는 명백히 신군부를 지원한 것이다. 그들은 또 금남로의 피가 채 마르기도 전인 1980년 8월 초순에 전두환이 집권하더라도 그 정부를 지지할 것이라고 결정하여 쿠데타와 학살을 정당화시키고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기 무섭게 외국 국가원수 가운데 가장 먼저 전두환을 초대하여 그의 정부를 정치적으로 후원했다. 미 국무성과 주한 미국관리들이 틈만 있으면 「한국의 정치 발전을 촉구한다」고 말한 것은 <미국이 한국 민주주의의 후견인이자 우방>이라는 케케묵은 동화를 더욱 오래 보존하기 위한 말 동냥(lip-service)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 민중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진실을 깨달았다. 미국 행정부가 스스로 뿌린 반미운동의 씨앗은 1982년 3월 18일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통해 충격적으로 발아(發芽)했다. 그리고 1985년 5월 23일 서울의 미문화원을 기습점거한 대학생들이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 행정부의 사죄를 요구하는 농성을 벌였을 때는 이미 다수 대중의 가슴속에 반미투쟁의 의지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대중의 호응을 통해 확인되었다. 그 이후 광주학살의 사죄요구에서 출발한 반미운동은 보다 깊은 연원을 찾아들어 민족자주권을 찾으려는 자주화 운동으로 확산·심화되었다.

대학생들은 1986년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 투쟁위원회(자민투)]를 결성하여, 해방 직후 점령군으로서 38선 이남을 점령하고 나서 친일 민족반역자들을 모아 대한민국의 경찰·군대·관료조직을 만들어 친미파쇼정권을 탄생시킨 미국 행정부의 원죄(原罪)를 추궁하고 주한미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공공연하게 부르짖기 시작했다. 1986년 5월 3일 신민당의 인천집회에서는 학생운동뿐만 아니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과 일부 노동운동조직 등 일반 사회운동까지도 반미 민족자주화 투쟁을 민족사적 과제로 받아들여 「반전반핵 양키 고홈!」을 공개적으로 외치기에 이르렀다. 이들의 이념적 반미투쟁은 미국 행정부의 농수산물 수입개방 요구와 맞물려 반미의식을 급속히 확산시켰다. 전국의 미군부대와 미국 문화원, 미국 대사관, 미국계 기업 등이 학생과 노동자의 공격대상이 되었고 작전통제권 회수와 주한미군의 철수요구가 공공연히 주장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1987년 6월 항쟁의 과정에서도 반미구호는 대중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다. 반미운동의 대중적 확산은 광주민중항쟁이 낳은 가장 직접적인 변화였으며 1980년대의 변혁운동을 과거의 그것과 명확하게 구분 지었다.

광주민중항쟁은 학생운동의 한계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었다. 5.17 직후 서울과 부산 등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일부 학생들이 산발적인 소규모 시위를 벌였지만 모두 군경에 의해 초동 진압당하고 말았던 것과 달리 광주에서 항쟁이 확산된 것은 소외계층이 투쟁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특히 차량시위를 주도한 운수노동자들과 도시빈민 등 소외계층들은 항쟁의 모든 과정을 통해 높은 전투성을 발휘했다. 따라서 전국의 노동자·농민·도시빈민들이 정치적으로 각성하고 계급적으로 단결하여 학생운동과 함께 반독재투쟁에 궐기해야만 군부독재와 싸워 이길 수 있다는 것은 광주민중항쟁이 남긴 가장 큰 교훈 가운데 하나였다.

이 교훈을 가슴에 품고 1980년대를 통틀어 그 수를 정확히 알 수 없을 정도의 청년지식인들이 노동현장으로 뛰어들었으며 일부는 농촌과 도시의 빈민가로 들어가 소외계층 속에서 정치적 선전과 조직사업을 전개했다. 그들은 전국 각지의 주요공장에 취업하여 노동자 서클을 만들고 노동조합을 조직하였으며 군부독재정권을 굴복시키지 못하는 한 노동자의 자유와 행복은 존재할 수 없다는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1970년대 조합주의적 노동운동의 한계를 뛰어넘는 정치적 노동운동을 출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뿐만 아니라 학생운동 그 자체도 민중운동을 지원하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아 노동자의 파업을 지원하는 대중적 투쟁을 벌이고, 대도시의 곳곳에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밀려나는 도시빈민들과 함께 힘찬 철거반대투쟁을 전개하였으며, 농수산물 수입개방에 맞서 대규모 농촌활동과 수입개방 반대운동을 통해 농민운동을 지원하고 연대투쟁을 펼쳐나갔다.

광주민중항쟁이 끝난 후 전두환 정권은 원풍모방과 콘트롤데이타 등 전국의 주요 민주노조를 모두 파괴하고 노동법을 개악하여 노동운동을 원천 봉쇄했다. 그리고 미국 행정부의 수입개방 요구에 굴복하여 소 값 파동 등으로 농촌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었다. 이 같은 노동자·농민 수탈정책은 광범위한 대중의 불만과 저항을 불러왔으며, 소외계층 민중운동과 청년지식인들의 결합을 촉진했다. 1985년 봄 인천 대우자동차 파업농성투쟁과 구로지역 민주노조의 연대투쟁은 소외계층 민중운동과 지식인운동, 그리고 학생운동의 결합과 연대, 그 위력과 가능성의 실마리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소외계층 민중운동을 확대·강화하고 정치적으로 진출시키는 사업은 단기간에 성과를 거두거나 완료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광주민중항쟁의 전국적 확대판이라 할 수 있는 6월민주항쟁이 부분적 승리를 거둔 1987년 7~8월 이후에야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은 급속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오늘날 전국의 수많은 민주노조는 많든 적든 간에 어느 정도는 현장에 뛰어든 지식인들의 노력과 노동대중 자신의 각성이 결합하여 태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소외계층 민중운동의 성장과, 지식인운동과의 결합, 그리고 강화된 정치적 지향성은 1980년대의 변혁운동과 이전 시기의 그것 사이에 굵은 획을 그었다.

광주민중항쟁은 또한 변혁운동이 전면적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부여하고 승리의 방법을 제시했다. 광주시민들은 처음 맨손에서 투쟁을 시작하였으나 3개 공수여단과 20사단의 2만여 무장병력에 맞서 열흘 동안이나 항쟁을 지속시켰다. 신군부가 무려 2만이나 되는 충정부대의 정예병력을 그 작은 도시에 집중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지역에서의 항쟁을 초기단계에 완전히 봉쇄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만약 민중항쟁이 전국의 주요도시에서 동시에 일어나기만 한다면 군부독재정권을 민중의 힘으로 타도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결론이었다. 따라서 전두환 정권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은 전국 주요도시에서의 동시다발적 봉기를 통해 군부독재를 힘으로 타도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통일된 행동을 전개할 수 있는 조직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학생운동은 1983년 말부터 시작된 전두환 정권의 유화조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1984년 하반기에 일제히 총학생회를 부활시키고 1985년부터는 지역별 협의회와 전국총학생회연합을 구축했다. 그들은 협의회도 못 되는 회의 수준에서 전국적 투쟁을 펼치다 일거에 와해되어버린 1980년 봄 학생운동의 잘못을 반복할 수 없었다. 재야 민주세력의 결집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역시 중앙조직뿐만 아니라 각 지역별로 민주세력을 망라한 지역지부를 조직했다. 청년지식인들이 주도한 노동자 서클들도 가두시위 수행 역량을 중심으로 비합법적인 서클연합을 추진했다. 그리고 여기에 1985년 2․12 총선에서 국민 대중의 기대를 한몸에 모으며 일약 제1야당으로 부상한 신민당이 가세했다. 신민당은 김대중·김영삼 씨의 양대 계파가 이민우 씨를 총재로 내세워 연합한 가장 강력한 현실정치권의 대체세력이었다.

1986년 봄부터 시작된 신민당 개헌추진본부의 각 지역지부 현판식은 가두시위를 주요한 투쟁방법으로 삼은 민주진영의 모든 세력이 한꺼번에 모여 민중의 민주화 의지를 분출하는 거대한 투쟁의 공간으로 발전하였다. 이 당시 민주세력은 1980년 봄에 비해 훨씬 강력한 힘과 조직을 가지고 군부독재 타도투쟁을 전개했다. 수세에 몰린 전두환 정권은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전투경찰을 대폭 증원하고 새로운 진압 장비를 동원하였으며 미증유의 인권탄압을 자행하여 민중의 궐기를 자초했다.

1986년 6월의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과 1987년 1월의 박종철군 고문살해사건은 전두환 정권에 조종을 울렸다. 1987년 2월 7일과 3월 3일의 박종철 고문살해 규탄시위는 대중적 항쟁의 징후를 드러냈다. 이어서 전두환의 4·13 호헌선언과 5월 가톨릭 사제단의 박종철 고문살해사건 은폐조작 진상 폭로는 대중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국민 대중은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는 어떠한 민주개혁의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으며,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전두환 정권을 굴복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스스로 투쟁의 대오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1987년 6월 10일부터 26일 사이의 약 보름 동안 전국 방방곡곡에서는 1980년 5월의 광주가 재현되었다.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으로 나선 수백만의 민중은 이제 미국 행정부에 대한 동화 같은 환상을 품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또한 학생들만의 선도적인 투쟁이 아니었으며 어느 지역의 고립된 투쟁도 결코 아니었다. 재야 민주세력의 결집체인 민통련, 기독교와 가톨릭과 불교, 교수·변호사·언론인·문인 등 각계각층의 지식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와 농민운동 단체, 유명무명의 각종 노동자 정치서클과 여성단체까지 망라된 위에 신민당의 양 계파까지 가세한 국민운동본부가 투쟁의 지도부였으며 청년학생, 노동자, 농민, 지식인, 종교인, 넥타이를 맨 샐러리맨들까지가 모두 거리의 전사가 되었다. 차량은 경적을 울리고 교회와 사찰에서는 종을 치고 젊은이들은 돌과 화염병을 들었고 여성들은 손수건을 흔들었다.

「광주학살 배후조종 미국놈들 몰아내자!」
「군부독재 지원하는 미국은 물러가라!」
「살인강간정권 타도하자!」
「광주학살 책임자를 처단하라!」
「대통령에서 동장까지 우리 손으로!」
「노동삼권 탄압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
「호헌철폐 독재타도!」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18일경 계엄령 선포와 군 투입을 검토했다. 그러나 서울·부산·대구·인천·대전·광주·전주·춘천 등 전국의 주요도시뿐만 아니라 읍 단위에서까지 궐기한 수백만 민중을 진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광주항쟁은 5월의 한계를 넘어 전국적 항쟁의 6월로 이미 전진해 있었다. 그러나 6월 29일의 기만적인 선언으로 말미암아 항쟁은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추어버렸다. 전면적 항쟁이 중단되어버린 6월 그날 이후 대통령선거라는 제한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민주진영은 선거제도를 통한 제한전에서 허망한 패배를 맛보았다.

오늘날에도 광주민중항쟁은 진행 중이다. 1988년 여소야대의 정국 속에서 국회 광주특별위원회와 5공화국 특별위원회의 청문회를 통해 실체적 사실의 확인과 국민적 공감대를 어느 정도 이루어냈고, 정부 또한 광주 항쟁을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함에 따라 1988년 이후에는 추모제 등이 합법적으로 거행되었다. 광주 유혈 진압의 최고 책임자라 할 전두환은 퇴임 직후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화국 비리 문제로 책임추궁을 당하다가 1990년까지 산사에 은거했으며, 1995년에는 마침내 구속되어 <반란수괴·반란 모의참여·반란 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 계엄지역 숙소이탈·상관 살해·상관 살해미수·초병 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의 죄목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그의 후임 대통령이었던 노태우는 17년형을 선고받았다.

동서 지역화합 차원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하던 같은 해인 1997년에 정부는 광주민중항쟁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했으며, 5·18 민주묘지를 준공하고 정부 주관의 첫 국가 기념식을 치렀다. 17주년 기념식이었다. 2001년 12월 21일, 국회는 광주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2002년 7월 27일 자로 시행해 5·18 민주묘지를 국립 5·18 묘지로 승격시켰다. 또한, 1990년 이후 5차에 걸쳐 사망 154명, 행방불명 70명, 부상 3,028명 등 총 4,362명의 희생자와 피해자에 대해 정부의 물질적 보상이 이루어졌다.

광주의 함성이 잦아든지 18년이 되던 해에 광주 항쟁의 배후로 지목되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김대중 씨는 대한민국의 1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2003년에는 인권변호사로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5공 청문회의 스타 정치인, 노무현 씨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유혈 진압으로 5·18 민중항쟁은 끝났지만, 청년학생을 비롯한 양심적인 민주인사들의 민중운동에 의해 항쟁의 정당성은 온천하에 입증되기에 이르렀고, 두 정치인의 대통령 취임은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 맞선 민중의 자위적 항쟁이 국민저항권으로 인정받았음을 공식적으로 대변한 일일지도 모른다.

1980년 5월 21일부터 27일까지 군대에 의해 고립되어 있던 동안에 광주 시민이 보여준 수준 높은 공동체 정신은 민주주의 발전의 훌륭한 모범이자 깨어 있는 시민이 민주사회 발전의 원동력임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망월동의 영령들은 항쟁의 완성을 호소하며 산 자들의 가슴을 아프게 후려치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광주에서 최초 발포를 명령한 자를 알지 못한다. 30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행방불명자의 묘비는 아직도 우리의 상처로 남아있다. 무엇보다 국가 권력의 횡포로 말미암아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온 이들의 한을 메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죄를 넘어 대한민국 공동체의 발전과 인권의 실현을 위해 우리가 모두 광주민중항쟁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면, 피맺힌 5월과 뜨거웠던 6월은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기억하지 않는 자에게 승화시켜야 할 유산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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