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 자의 광주 – 제5부 전진하는 오월

기억하는 자의 광주 –  제5부 전진하는 오월

1. 희생자
2. 진상 규명 투쟁과 민주화 운동
3. 6월

1. 희생자

지금까지도 실종자들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고 있듯이 광주항쟁 기간에 희생된 민간인의 숫자는 계엄군의 도청 진압작전 이후에도 오래도록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비상계엄과 정치인에 대한 연금과 구속, 언론 장악 등에 이어 광주에서 군을 동원해 민주적 항쟁을 유혈 진압한 정치군인들은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공포를 조성하는 방법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제5공화국 정권이 유지되던 기간에 정부 측은 여러 차례에 걸쳐 다음과 같이 희생자의 숫자를 발표했지만, 그 숫자는 그때마다 달랐다.

광주항쟁의 사망자 숫자는 암매장 의혹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음과 같이 광주지방검찰청이 광주특위에 제출한 검시기록과 육군본부의 각종 문서, 그리고 항쟁 참여자들의 증언을 비교‧검토해보면 정부가 발표한 숫자의 신빙성이 매우 약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례를 들어 5월 21일 저녁부터 5월 24일 오전까지 교도소 방어임무를 수행한 3여단 11대대장 임수원 중령이 「시위대로부터 5차례에 걸쳐 공격을 받고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에 사망한 민간인 6~7명을 교도소 인근에 가매장했다.」고 말한 데 반해, 5월 24일 오전 3여단으로부터 임무를 인계받아 교도소에 주둔했던 20사단장 박준병은 「62연대장에게 교도소에서 가매장한 시신을 인계받은 적이 있느냐고 하자, 그런 일이 전혀 없다고 얘기했고 그러한 사실이 없음을 확인했다.」라고 말해 엇갈린 증언을 했다.

두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이 6~7구의 시신은 교도소 어느 곳엔가 영원히 묻혀버린 셈이다. 또 5월 23일 아침과 오후에 걸쳐 총 28명의 시민을 학살한 광주―화순 간 국도변 제7, 11공수여단 작전지역의 예도 마찬가지다. 「5월 24일 아침 7시경 주남마을 뒷산에서 철수하기 위해 헬기장에 가보니 총상을 입은 교련복 차림의 청년 2명과 가벼운 부상을 입은 여고생 1명이 있었는데 11여단 소령이 지시하여 두 사람을 현장에서 즉결처분했다.」라는 7공수여단 최영신 중사의 증언 1989년 1월 16일, 광주특위 현장검증소위원회 제1차 현장검증 속기록, 2~3쪽과 이 중 유일한 생존자인 홍금숙, 이상기, 임희주 씨 등의 증언은 곳곳에서 즉결처분과 암매장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암매장되었을 가능성이 많은 행방불명자 신고가 1990년까지만 해도 총 102명에 이르고 있었으며, 그 이외에 무연고자로 암매장된 수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90년에 행방불명자를 광주시청에서 신고받았는데, 1명 이상의 인우보증인과 인감증명서 첨부를 요구하는 등 행정절차가 까다롭고 경찰이 보증인들에게 협박과 압력을 가해 시청이 인정한 행방불명자는 단 17명에 불과했고 27명이 재심사 과정에 있었다.

광주항쟁이 끝난 직후인 5월 29일에 망월동 시립묘지 3 묘역에 안장된 5·18 영령의 묘는 129기였다. 최규하 정부는 민간인 사망자에 대해 위로금 400만 원과 장례비 20만 원 등 모두 420만 원을 주겠다고 발표했지만,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 희생된 것이 확실한 36명의 유가족에게는 폭도라고 하여 위로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1983년에 들어서는 [전남지역개발협의회]라는 관변단체를 만들어 유족들에게 묘를 이장하면 1천만 원의 위로금과 이장비 50만 원을 주겠다고 제안해 26기의 묘를 다른 곳으로 옮기게 했다.

광주항쟁의 부상자 숫자 역시 불확실하다. [5·18 부상자동지회]가 조사한 바로는 광주통합병원에서 치료받은 299명, 여타 광주시내 병원에서 치료받은 858명, 1988년 초 [민주화합추진위원회]가 추가로 신고받은 512명 가운데 중복된 사람을 제외하면 1,468명이고 자가치료를 받고 신고하지 않은 부상자를 포함하면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신군부는 앞의 표에서 본 것처럼 부상자가 127명에 불과한 것으로 축소 발표하였으며, 아직 완치되지 못한 부상자들을 강제퇴원시킨 결과 항쟁 이후 50여 명이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사망자나 부상자의 유족과 가족들은 혈육을 잃은 정신적 상처와 폭도라는 누명, 그리고 경찰의 감시와 탄압 때문에 오랫동안 고통을 당했다. 특히 가장이 사망하거나 부상한 경우, 그 가족들은 생활고와 치료비 등으로 말 못할 고초를 겪었다. 다음 증언이 그들의 한과 분노를 대변한다.

이렇듯 정부는 항쟁이 끝난 이듬해의 1주기 추모식은 물론 1982년의 2주기 추모식도 경찰을 동원해 원천 봉쇄했으며 1983년에는 유족과 부상자를 격리해 추모식을 무산시키고 묘지 이장 회유 정책으로 유족 중 일부를 이탈시켰다. 이런 일은 12대 총선에서 야당이 승리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항쟁이 끝나고 나서 10년의 세월이 지난 1990년부터 2004년까지 5차에 걸친 신고와 심의를 통해 정부가 광주 항쟁 희생자로 인정한 숫자만도 총 4,362명(사망 154명, 행방불명 70명, 부상자 3,028명, 기타 1,628명)에 이르렀던 광주에서의 학살 만행을 대한민국의 대다수 국민은 1988년 국회에서의 광주특별위원회 청문회가 열리기 전까지는 자세히 알 수도 없었다. 언론이 사실을 왜곡하거나 은폐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가 21일 자 신문에 계엄사령부의 발표문을 그대로 옮겨 실었을 뿐, 1980년 5월 18일부터 21일까지의 상황에 대해 모든 언론이 전혀 보도하지 않는 상황에서 조선일보는 22일 자 신문에 「고정간첩이 광주에 침투하여 데모를 선동하고 있다.」는 계엄사령관의 경고문을 함께 싣는 등 심지어 왜곡에 동참하기까지 했다. 기자들은 금남로에 들어가 보지도 못한 상황에서 현장 취재를 가장한 기사를 보냈으며 심지어는 「군인을 잡아 낫으로 찔러 죽이고 껍질을 벗기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국방송은 못 믿으니 이북 방송을 들어라」, 「어린이 중학생을 앞세워 교도소를 7차례나 습격했다」는 식의 각색 기사까지 내보내는 등 광주의 참혹함을 숨기는 데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기까지 한 언론들이 광주 시민의 호소문 등을 보도해줄 리는 만무했던 것이다.

이처럼 광주항쟁은 곧 폭력시위라는 등식으로 국민에게 사실을 왜곡해 전하는 기사들은 5공화국 정권이 끝나기까지 이어졌다. 6공화국 정권 기간에도 추모 시위를 강조해 보도하는 방법 등으로 광주항쟁을 지역화시키거나 군부의 폭력을 정당화해 국민저항권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올바르게 전하려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시위와 무관하거나, 비무장 상태에서 군의 총격에 의해 목숨을 잃은 희생자,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과 잔인한 행위, 연행과 구금과정에서의 잔인한 행위 등, 최소한의 인간 존엄성마저 짓밟았던 행위들까지 언론들이 나서 철저히 은폐하고 왜곡했던 상황에서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웠던 것은 폭도라는 누명이었다. 언론이 나서 희생자와 광주 시민들에게 폭도라는 누명을 뒤집어씌운 것이다.

유가족들과 희생자들에게 또 하나의 고통스러웠던 점은 가족의 해체였다.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위령제조차도 경찰의 방해로 치를 수 없던 시절은 생존마저 위협받고 있던 유가족과 희생자들에게 더욱 고통스러운 시간이 되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젊은 며느리를 떠나보내고 손녀의 엄마가 되어 모진 세월을 눈물로 지새웠지만, 뒤통수가 깨지고 눈알이 터지고 팔과 어깨, 목뼈,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어져 참혹한 주검으로 돌아온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시민군이었던 김우곤 씨는 5개월에 걸친 고문의 후유증에 평생 시달렸다. 아내는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가정을 떠났고, 아들이 어머니를 찾으러 학교를 그만두고 가출하던 즈음에 그는 마침내 실어증에 걸렸다. 공수부대원의 총에 두 눈을 잃은 강해중 씨는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된 남편과 6남매를 부양해야만 했다. 이렇듯 유가족과 희생자들의 고통은 생활에서 이어졌지만, 학살의 원흉들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2. 진상 규명 투쟁과 민주화 운동

10일간의 항쟁이 끝나고 나서 학살의 책임자들이 절대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동안에도 진상 규명을 위한 투쟁은 이어졌다. 구속자 가족들은 구명운동을 벌였으며 사망·실종자의 가족들과 부상자들은 신군부 정권에 맞서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처절한 투쟁을 벌여 나갔다. 비록 10일에 걸쳐 처절하게 무너진 항쟁이었지만, 민주화 요구와 맞물려 그 여파가 점차 전국적으로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5월 30일에는 서강대생 김의기 군이 학살정권 타도를 외치며 투신했다. 6월 9일에는 “광주 시민항쟁의 넋을 위로하며”라는 유서를 남기고 노동자 김종태 씨가 분신했고, 12월 9일에는 <광주 미문화원>이 방화로 불탔다. 이런 항쟁은 해를 넘기면서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1981년에는 서울대생 김태훈 씨가 투신했다. 1982년에는 <부산 미문화원>이 방화로 불탔고, 5·18 진상 규명을 요구하면서 단식하던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 씨가 옥사했다. 1983년에는 미국대통령 레이건의 방한에 맞추어 광주학살의 배후 조종 책임을 묻는 반미시위가 이어졌다. 온갖 봉쇄와 방해를 무릅쓰고 마침내 3천여 명이 참석하는 5·18 4주기 추모식이 거행되었던 1984년에는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을 반대하는 농성을 해산하기 위하여 경찰이 <명동성당에까지 난입>하기에 이르렀다.

전두환 정권 7년 동안 하루 평균 1.6명이 정치적 이유로 구속되었다. 1981년에서 1983년까지 3년여의 기간에만 약 1,400여 명의 학생이 제적되었음에서 알 수 있듯이 1983년 말에 이미 제5공화국 정권은 점차 가혹한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고 있었지만, 미국 정부의 입장은 달랐다. 반미 시위의 격화는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과 미국 내 여론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따라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미국의 주문은 달라졌다. 전두환 정권이 1983년 하반기에 시국사건 구속자 석방, 제적생 복교, 정치규제자 해금 등의 조치를 취한 데 이어, 1984년에 <학원자율화 조치> 등 일련의 유화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는 미국의 압력이 어느 정도 작용했던 것이다.

학원자율화 조치에 따라 학교 내 주둔 경찰은 물러났고 전두환 정권에 의해 폐지되었던 총학생회를 부활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서울대 [학생회부활추진위원회]는 9월 13일에 <학도호국단의 전면 폐지를 결의>한 데 이어 27일에는 선거를 통해 학생회장을 선출했다. 전두환 정권은 즉시 선출된 총학생회장 이정우를 수배하고 서울대학교 본부는 제적 처분을 내렸다. 학생들은 이에 수업거부와 중간고사 거부로 맞섰고, 마침내 정권은 10월 24일 교내에 전투경찰 6,500명을 투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학생들의 항거는 점차 강도를 더해갔다. 11월 3일 학생의 날을 맞아 연세대에 모인 전국 42개 대학 총학생회장과 [학원민주화 추진위원회] 위원장들은 [반독재 민주화 투쟁 학생연합]의 결성을 선언했고 11월 14일에는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대학생 264명이 민정당사를 점거하고 농성을 감행했다. 그뿐만 아니라, 5·17 이후 노동법 개정, 민주노조의 해산 등으로 침체해 있던 노동운동에 제적된 학생들이 <노학(勞學)연대 투쟁>을 통해 참여하는 일들은 학생, 노동자는 물론 종교단체, 민권 세력과 정치권의 연대로까지 폭을 넓혀가는 계기가 되었고, 마침내 1985년 2월 총선에서 야당은 승리했다. 1985년 5·18 5주기 추모식에는 일반시민뿐 아니라 야당의원, 재야인사, 종교인 등 500여 명이 참석했다.

1985년 5월 23일, 서울 5개 대학생 73명이 <미문화원>을 점거하고 72시간 동안 농성에 들어갔다. 민주주의 혈맹으로만 알았던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독재정권의 살인만행에도 눈감을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학생들은 주한 미국대사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광주 민중항쟁의 진상 규명과 전두환 군부독재에 대한 미국 지원 철회를 주장했다. 8월 15일에는 노동자 홍기일 씨가 금남로에서 분신했다. 12월 2일에는 <광주 미문화원> 점거 농성이 이어졌고, 1986년에는 4월 28일에 서울대생 이재호, 김세진 씨가 「반전반핵, 양키고홈!」을 외치며 분신했다. 5월 3일에는 신한민주당 인천 및 경기지부 결성대회가 열릴 예정이던 인천시민회관에서 직선제 개헌 관철과 신한민주당의 각성을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고, 이에 따른 공권력 투입으로 당 지도부가 대회장으로 입장하지도 못한 채 무산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319명이 연행되었고 129명이 구속된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운동권 탄압을 본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7월 3일에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서울대학교 의류학과 4학년생이었던 권인숙 양의 위장취업 혐의를 수사하던 당시 부천서 조사계 문귀동 형사가 5·3 사태 관련자의 행방을 물으면서 <뒷수갑이 채워져 저항할 수 없었던 여성을 자신의 성기로 추행하는 고문을 자행>한 것이다. 10월 28일에는 건국 이후 최대의 공안 사건이라 일컬어지는 <건국대 사건>이 발생했다. 전국 26개 대학생 2,000여 명이 서울 건국대학교에 모여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 학생 투쟁연합(애학투)] 결성식을 하던 중, 교내로 진입한 3,000여 명의 경찰과 1986년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대치하던 끝에 총 1,525명이 연행되고, 이 가운데 1,289명이 구속 송치되어 877명이 기소유예로 석방되었고, 398명이 구속 기소된 것이다. 단순히 결성식 행사를 하고자 모여든 학생들에 대하여 학생 수보다 많은 전투경찰을 투입하고 헬리콥터까지 동원해 과잉반응함으로써 오히려 국민적 관심사로 키워버린 전두환 정권은 사건 발생 다음날인 10월 29일에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 추진계획>을 발표해 엄청난 물난리가 곧 밀어닥칠 것처럼 희대의 사기극을 펼쳤다. 이 농성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반공 쪽으로 유도한 것이다. 금강산댐 건설 추진계획의 발표와 <평화의 댐> 건설 모금 행사를 대대적으로 전개한 것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전두환 정권의 위기 돌파용 <조작사건>이었음은 93년 문민정부 탄생 후 진행된 특별감사에서 드러났다.

12·12 군사 쿠데타에 이어, 5ㆍ18 민중항쟁 이후 극심한 탄압에 의해 숨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민주화운동 세력은 1983년 9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의 출범을 계기로 긴 겨울잠에서 깨어났다. 이후 1984년 6월 민청련 등이 중심이 되어 통합조직으로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가 출범했고, 1984년 10월 문익환, 계훈제, 백기완, 이창복, 장기표 등 재야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민주통일국민회의(국민회의)]가 결성되었다. 국민회의와 민민협은 정치적 상징과 대중운동의 강화라는 양 측면을 각기 대표하면서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두 단체는 통합논의를 진행하여, 1985년 3월 마침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출범하였다. 1989년 1월21일 출범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으로 계승되기까지 비록 짧은 기간 동안 운영되었지만 1987년 6월 항쟁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등 전국적인 민주화운동 연합체로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결정적인 구실을 한 민통련에 대해 전두환 정권은 5·3 인천 사건과 건국대 사건을 빌미로 해산명령을 내렸다.

1987년 새해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시작되었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다니던 박종철 군을 불법연행해 고문 중에 사망케 한 경찰은 고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자기압박에 의해 충격사했다」고 발표했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후 부검의였던 중앙대학교부속 용산병원 내과전문의 오연상의 「고문치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증언이 알려지자 <물고문>에 의한 질식사로 다시 발표하면서 현장검증마저 비공개로 시행하고 마무리하려 했으나,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 8과장 황적준의 부검소견서가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요청으로 <외상 없음>으로 조작되었다는 황적준의 일기 증언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끈질긴 추적에 의해 드러나면서 온 국민은 충격과 분노에 떨었다. 고문치사와 이의 은폐라는 사실 앞에서 국민은 국가 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이는 결국 1987년 6월 민주 항쟁에 일반 국민까지 폭발적으로 참여케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3. 6월

광주 금남로에 뿌려진 피의 흔적이 흐려졌을 만큼 긴 시간이 흘렀다. 7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투쟁과 희생이 이어졌지만, 아직도 광주민중항쟁의 진상은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다. 1986년에 발생한 부천서 성고문 사건과 건국대 사건, 1987년 새해 벽두부터 온 나라를 뒤흔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국민 대다수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전두환 정권의 자세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3월 6일에는 표정두 씨가 서울 세종문화회관 근처에서 몸에 불을 붙였다. 「내각제 개헌 반대, 장기집권 음모 분쇄, 박종철을 살려내라, 광주사태 책임지라」는 구호를 외치며 몸에 불을 붙인 채 주한 미국대사관으로 달리던 그는 쓰러져 3월 8일에 운명했다. 경찰은 고인의 유해를 유가족과 민주인사들로부터 분리시켜 화장하고 금강에 뿌렸다. 5월 18일에 치러진 광주항쟁 7주기 추모식에는 예년과 달리 수십만 명의 시민이 참여했지만, 민통련에 대한 해산 명령과 노동운동에 대한 강력한 탄압, 야당인 신한민주당 내부의 갈등 등으로 표면상 민주 세력의 조직적 역량은 오히려 위축된 것으로 보였다.

양김 세력(김대중, 김영삼)이 이민우 일파와 결별해 독자적 신당인 통일민주당 창당을 선언한 데에 위기를 느낀 전두환 정권은 국론 분열과 국력 낭비를 줄일 수 있다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걸면서 종래의 간선제 방식으로 후임 대통령을 선출하겠다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운동권 전체에 대해 타격을 가했다고 믿었는지 장기집권 음모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대통령 직선제 쟁취」 등의 구호는 이제 정치인, 지식인, 학생, 종교인, 민주화 운동가들의 구호만이 아니었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해 18년 동안 이어진 독재 정권이 비극적으로 끝났음에도 또다시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이 일방통행식으로 사회를 통제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공화국의 시민들은 일종의 절박감을 느꼈다. 범여권 민간단체들은 이 조치를 구국적 선언으로 환영했지만, 변호사, 종교인, 교수, 문인 등 지식인들의 여론 주도로 각 계층의 호헌 반대선언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가운데 점차 반대 시위는 전국적이고도 광범위한 계층의 참여로 확대되고 있었다. 4월 21일에는 천주교 광주교구 신부 12명이 직선제 개헌을 위한 단식 농성을 시작했다. 단식 농성은 점차 각 교구로 확산되었고, 교수, 재야인사의 시국성명과 무기한 농성은 호헌 반대투쟁을 더욱 고조시켜 4월 22일 이후 [직선제 민주헌법 실현을 위한 서명운동]에 광범위한 계층이 동참하였다.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도 미사 도중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모두 5명이 가담한 고문치사사건을 단 2명만이 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꾸미고, 그 2명에게는 거액의 돈을 주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전두환 정권은 뒤늦게 국무총리를 교체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5월 27일에는 제도권 정치세력은 물론 가톨릭, 개신교, 노동자, 농민, 여성 등 모든 민주화운동 세력을 총망라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가 결성되었다. 전두환 정권이 해산시키려 했던 민통련은 이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민통련은 결국 [국본]을 통하여 6월 항쟁을 승리로 이끌어냈다.

6월 9일에 연세대생 이한열 군이 최루탄의 수평 발사에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럼에도, 전두환 정권은 그 다음 날인 6월 10일 아침,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같은 육사 11기인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면서 권력승계 절차를 밟고 있었다. 같은 날에 성공회 서울 주교좌 대성당에서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개최되고 있었고, 이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22개 도시에서 24만여 명(국민운동본부 집계, 경찰 발표는 1만 8천5백 명)이 참여한 가운데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30여 군데가 넘는 지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전국적으로 동 시간대에 조직적 시위를 진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 민주 진영의 역량에 초조해진 경찰은 무차별 폭행을 가하면서 전국에 걸쳐 3천8백여 명을 무차별 연행했다. 서울 도심의 시위대 중 일부는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5일에 걸쳐 경찰과 대치했다. 시민들도 택시운전사들이 차를 세우고 경적을 울리거나, 여고생들이 시위 참여자에게 마실 물을 가져다주는 등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원을 했다. 이제 민중 항쟁의 규모는 경찰력으로는 제압할 수 없는 거대한 규모로 확대되고 있었던 것이다.

6월 18일에는 전국 16개 도시에서 1백50만 명(국민운동본부 집계, 경찰 발표는 8만 6천 명)이 참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경찰력이 한계를 드러냄에 따라 전두환 정권 내부에서 군대를 투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대책이었다. 그들은 이미 광주에서 군을 투입했었고, 유혈로 점철된 광주의 희생은 7년의 세월을 넘어 큰 불길로 전국을 불태우고 있었다. 분노한 민중은 동요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결연히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최루탄 추방대회]가 열린 6월 18일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시위가 전개되었지만, 그 규모와 치열함에서 부산은 단연 압도적이었다. 부산 시민들은 자신들이 움직이면 정권이 바뀐다는 확신으로 이번 기회에 아예 정권을 갈아 치우자는 의지로 적극적인 투쟁을 벌여 나갔다. 부산에서의 대대적인 항쟁은 전국적으로 커다란 파급 효과가 있었고, 6월 26일 국민운동본부의 제창에 의해 개최된 [국민평화대행진]에는 전국의 34개 도시와 4개 군에서 1백만 명(국민운동본부 집계, 경찰 발표는 5만 8천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광주에서는 약 30만의 시민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실로 광주 인구의 반에 육박하는 숫자였다. 이미 6월 20일부터 당황한 빛이 역력했던 미국은 더욱 공개적으로 한국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항쟁기간 동안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6월 26일의 투쟁이 벌어지자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판단에 도달하게 되었다.

결국, 6월 29일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의 수용과 구속자 석방 및 김대중 씨의 사면·복권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노태우 자신의 결단임을 강조했지만, 이는 전두환 정권 차원에서의 기획이었으며 차기 정권을 재창출하기 위해 국민을 기만한 선언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6·29 선언 전문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저는 각계각층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여 이 나라의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정부 역시 국민들로부터 슬기와 용기와 진정한 힘을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역사와 국민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저의 구상을 주저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구상은 대통령각하께 건의를 드릴 작정이며, 당원동지, 그리고 국민여러분의 뜨거운 뒷받침을 받아 구체적으로 실현시킬 결심입니다.

첫째, 여야 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선거를 통해 88년 2월 평화적 정부이양을 실현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이 시점에서 저는,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고, 국민적 화해를 이룩하기 위하여서는, 대통령직선제를 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국민은 나라의 주인이며, 국민의 뜻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입니다.

둘째, 직선제 개헌이라는 제도의 변경 뿐만 아니라, 이의 민주적 실천을 위하여는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어 국민의 올바른 심판을 받을 수 있는 내용으로 대통령선거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또한 새로운 법에 따라, 선거운동 투개표과정 등에 있어서 최대한의 공명정대한 선거관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세째, 우리 정치권은 물론 모든 분야에 있어서의 반목과 대결이 과감히 제거되어 국민적 화해와 단결을 도모하여야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저는 그 과거가 어떠하였든 간에 김대중씨도 사면복권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우리와 우리들 자손의 존립기반인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부인한 반국가사범이나 살상 방화파괴 등으로 국기를 흔들었던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시국관련 사범들도 석방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들도 민주시민사회의 일원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넷째, 인간의 존엄성은 더욱 존중되어야 하며 국민 개개인의 기본적 인권은 최대한 신장되어야 합니다. 이번의 개헌에는 민정당이 주장한 구속적부심 전면확대 등 기본권 강화조항이 모두 포함되기를 기대합니다. 또한 정부는 인권침해사례가 없도록 특별히 유의하여야 하며, 민정당은 변호사회 등 인권단체와의 정기적 회합을 통하여 인권침해 사례의 즉각적 시정과 제도적 개선을 촉구하는 등 실질적 효과거양에 주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 언론자유의 창달을 위해 관련제도와 관행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합니다. 아무리 그 의도가 좋더라도, 언론인 대부분의 비판의 표적이 되어온 언론기본법은 시급히 대폭 개정되거나 폐지하여 다른 법률로 대체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방주재 기자를 부활시키고 프레스카드 제도를 폐지하며 지면의 증면 등 언론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여야 합니다. 정부는 언론을 장악할 수도 없고 장악하려고 시도하여서도 아니됩니다. 국가안전보장을 저해하지 않는 한 언론은 제약받아서는 아니됩니다. 언론을 심판할 수 있는 것은 독립된 사법부와 개개인의 국민임을 다시 한번 상기합니다.

여섯째, 사회 각 부문의 자치와 자율은 최대한 보장되어야 합니다. 각 부문별로 자치와 자율의 확대는 다양하고 균형있는 사회발전을 이룩하여 국가발전을 이룩하여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된다고 믿습니다. 개헌절차에도 불구하고 지방의회 구성은 예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어야 하고 시 도 단위 지방의회 구성도 곧이어 구체적으로 검토, 추진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학문의 전당인 대학의 자율화와 교육자치도 조속히 실현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대학의 인사,예산,행정에 대한 자율성을 보장하고 입시,졸업제도도 그와 같은 방향으로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수한 많은 학생들이 학비조달에 큰 어려움이 없도록 관련제도를 보완하고 예산에 반영하여야 할 것입니다.

일곱째, 정당의 건전한 활동이 보장되는 가운데 대화와 타협의 정치풍토가 조속히 마련되어야 합니다. 정당은 국리민복을 위하여 책임있는 주장이나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형성하고 결집하는 민주적 조직체이어야 합니다. 정당이 이러한 목적에 위배되지 않는 건전한 활동을 하는 한, 국가는 이를 보호하고 육성하는 데 진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덟째, 밝고 맑은 사회건설을 위하여 과감한 사회정화 조치를 강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모든 시민이 안심하고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폭력배를 소탕하고 강도절도 사범을 철저히 단속하는 등 민생활 침해사범을 척결하고 우리사회에 잔존하는 고질적인 비리와 모순을 과감히 시정해 나가야 합니다. 근거 없는 유언비어가 추방되고 「지역감정」이나 「흑백논리」와 같은 단어들이 영원히 사라져 서로 신뢰하고 사랑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온 국민이 안정된 사회환경 속에 안심하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활기찬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항들이 오늘의 난국을 타개하고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시급한 당면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국민 여러분!

역사의 단절이 아니라 지속적 발전을 바라는 여러분의 기대를 등에 업고 역사와 국민을 두려워하는 겸허한 마음으로 오늘 저는 이 제안을 감히 하는 바입니다.

저는 우국충정에서 나온 이 구상이 대통령 각하와 민주정의당 전 당원은 물론이고 국민 모두의 성원으로 꽃피울 수 있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저의 이 기본구상이 받아들여진 경우에는 앞으로 이에 따라 세부 추가사항들이 추진될 것입니다.

만의 일이라도 위의 제안이 관철되지 아니할 경우, 저는 민정당 대통령후보와 당대표 위원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사퇴할 것임을 아울러 분명히 밝혀두는 바입니다. (1987년 6월 29일, 민주정의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의 노태우 대통령 후보 연설 전문.)

민주정의당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의 6·29 선언 이후, 1987년 10월에는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고, 16년 만에 대통령선거가 직접선거로 치러졌다. 그러나 당시 야당의 중심축이었던 김대중 당시 통일민주당 고문과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대통령 후보 출마를 놓고 분열을 일으키면서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는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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